2014. 12. 16. 02:18

처음 커다란 문을 두드린 걸 기억한다. 들어설 때 나던 낯선 공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볼 시간도 없었다. 앉았을 때 놀랍도록 푹신하던 의자, 제 옆에서 포크를 건네주던 검은 머리의 누나. 예쁘지만 어딘가 피곤해보이던 여자. 나는 모든 걸 어렴풋이, 또한 선명하게 기억한다. 귀 뒤로 들리는 문이 열리던 소리. 처음 보던 또래 남자아이. 귀찮은 듯이, 그러나 한편으론 순종적이게 제 어미의 말을 따라 자신과 걷던. 이름이 뭐야? 대답하던 성가신 음성을 기억한다. 백건. 나는 그 한 마디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아주 오래동안.


8년.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 시간동안 나는 너와 무수히 많은 대련과 대화를 나눈다. 또한 수많은 접촉도. 나는 큰 기이함이나 제게 일어나는 변이나 갑자기 숨이 막히던 모든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알아챈 뒤엔 나와 네 곁엔 어느새 떨어지지 않을 두 명이 더 붙어있었다. 우습지만 내게는 정말로 당연하게 너를 좋아했다. 자각한 뒤에는 너와 함께 있을 시간이 이전과는 달리 여겨진다. 단 둘이. 너와 있고 싶었다. 옆에는 현무와 청룡이 있다. 너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끼어들만하다고 유치한 생각을 해야만 할 사람들은 아니다. 길가에서 지나친 넘어진 아이처럼. 가볍다. 존재와 의의조차도 희미하다. 그러나 그것은 끈덕지게 제 마음에 달라붙어 답답함으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지나치기 전에 잡아줄 것을, 또는 일으켜 줄 것을. 이미 늦은 일이며 나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련하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에 오기 전에 너에게 말을 할 것을, 좀 더 빨리 자각할 것을. 좀 더 많은 시간을 둘이 보낼 것을. 몇 번이고 곱씹던 손톱처럼 행동만큼이나 미미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못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난 네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 할 수 있고, 다른 이들보다 유대도 뛰어나며 서로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보다 높다. 내가 웃거나 넋을 놓을 때도 넌 의문을 가지거나 일일히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바라보는 것처럼 너도 내게 익숙해진 터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너는 무례할 정도로 당당하고 털털하며, 그럼에도 아주 가끔씩은 쑥맥처럼 군다. 그리고 친근한 이에게만 보이는 까칠한 다정함이 있다. 너를 좋아한다. 그러나 간혹, 마음을 간절하게 하는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다. 나는 네가 하는 행동이 뿌듯하고, 친숙해 좋기도 했지만 못내 섭섭하기도 했다. 식탁위에 놓인 물을 집어드는 남자. 백건. 부르면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익숙하고 뇌리에서 잊을 수 없는 모습 그대로다. 왜?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말투가 불손하다. 냉장고에 찬 음료 있어. 너는 대답없이 뒤돈다. 못들은 것처럼, 또는 신경쓰지 않는것처럼. 그리고 넌 내 말을 듣고 냉장고 문을 연다. 손잡이를 잡은 손은 크다. 하하. 난 들릴 듯 말듯 웃는다. 냉장고 문 위로 삐져나온 색이 옅은 머리카락. 이상하게 당연한 것이 좋았다. 네가 스스로 감당하기 벅찰만큼 좋았다.


아침에는 부스스하게 눈을 뜬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교복이 걸려있을 장농을 쳐다본다. 닫힌 나무문. 오늘은 열 일이 없을거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약간 찌뿌둥한 어깨를 돌며 밖을 내다본다. 종이 사이로 보이는 빛은 아침이었다. 문을 열면 마당, 옆을 보면 매화장. 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는다.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나무 위에 서있는 건 너. 그처럼이나 당연하게 너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게 틀어지거나 잘못되리란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올곧은 믿음.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을지. " 좋은 아침. " " 어. " 무미건조하고 의미있는 대화. 내게는. 그랬다. 나는 우뚝 솟은 나무들 앞으로 걸어간다. 한 발로 서서 역기를 들고 있는 너는 우람하게도 보인다. 현우와 청가람은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선선하다. 가슴이 파인 제 옷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닭살이 돋는다. 몸을 움직이면 괜찮아 지겠지? 나는 위에 있는 너를 올려다본다. 시선을 느낀 너의 반응이 느리다. 오래토록 올려다봐야만 시선을 내린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거나 걷는게 당연한 것처럼. 이것도 같다. 백건. 제 이름이 불린 이유를 묻는 얼굴. 불안, 조급, 초조함. 나는 이상하게 기대감마저도 없이 인사만큼이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백건. "

" 왜 자꾸 불러? " 인상 쓴 얼굴. 저러니 까칠하다고 소문이 나지.

" 나 너 좋아해. "


백건이 들고 있던 역기는 무거워서, 떨어짐과 동시에 매화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다.





' 왕철씨! 어서 가요. '

" 나 저 배우 보기싫어, 안 봐. "

" 공자, 언제 마지막으로.. "

" 더러워! "


기운차구나. 먼. 문 안에서 한참동안이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할머니와의 대화를 마치고 일어선다. 제 다리에 몸을 비비는 멍뭉이가 푹신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건으로 마른 얼굴을 문지르는 백건이 있다. 당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빽건! ㅂ 발음은 언제나 악센트가 실리기 마련이라 저는 종종 별명처럼 그리 부르곤 했다. 꼭 친구끼리 부르는 애칭처럼 들린다. 이 생각을 알거든 백건이 나를 한강물에 던지려 들겠지. 제 생일에 은이 누나가 온다는 말에 백건은 집을 나선다. 수염도 안 깎는거 봐 저거.. 안경을 저리 잘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한다. 문을 나서기 전 멀어지는 뒷모습을 본다. 째진 눈으로 쨍알대는 청가람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고, 방으로 들어가려 벽을 짚던 참이다. 곁눈으로 보이는 매화장. 아직도 쓰러져있는 나무들, 파편. 선명하게 찍힌 자국. 먼지 바람이 허황하게 분다. 나무조각이 날아오진 않을까? 의미없는 생각을 한다. 그처럼 나는 네 대답을 기억했다.


' 제발 친구로 끝내자. '


주변이 엉망이 된 원인이 제가 아닌듯이, 녀석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라 생각한건가. 너는 네가 만드는 소란을 가볍게 여기면서도 주도면밀한 면이 있다. 너는 쉽게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을 수도 있지만 그리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고, 너도 그렇게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멀어지려던 뒷모습을 마저 본다. 꽁무니 하나. 어째 입술이 씰룩거린다. 고작 그 정도 반응이라 이거지.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본다. 저와 같은 방향을 눈을 반짝이며 보던 현우. 그래. 일단은 이정도면 될테다. 네가 먼저 안하면 내가 다시 하지. 주먹을 쥔다. 세게. 뚫어질 듯 문을 바라보는 현우를 보며 사람좋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 쟤 속세나들이 하네. 기왕 가는김에 같이 가봐. " 

" 정말입니까 주작공자! " 그래도 됩니까? 미심쩍게 들리는 질문이었으나 바라는 대답은 표정에서 훤히 보였다. 

" 응. 어차피 네가 같이가면 백건도 나돌아다니기 귀찮아져서 금방 돌아올걸. "


답례로 나는 네게 엿을 보냈다.






아침 수련때다. 제가 망가뜨린 매화장을 드디어 수리해놓은 백건이 옆에 있다. 평정 유지, 근육 단련! 수련하면서 들었던 구부정하고 낡은 말들은 의미없이 머리속을 지나간다. 무념무상이 수련에 가장 좋다고 하지만 여러생각이 머리속을 지나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자 목소리, 여자 목소리. 그 중에 앙칼졌던 여자 목소리. 난 양아치는 정말 싫어! 날 때릴거야.. 넌 친구밖에 모르니? 하늘을 본다. 유나비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가볍고 큰 의미없는 문제에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백건이 저를 본다. 난 아무말도 안했는데. 들었는데도 들은 것 같지가 않다. 


" 친구에서 더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건가? "

" 제발 친구에서 끝내자. "

" 너 말고! "


소리친 후에야 같은 대답을 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아, 이런 멍청한.. 질린 기분이 든다. 저 놈이나 나나 아침때라 머리가 덜 깼나보군. 때아닌 무안은 김칫국을 들이마신다는 냉철한 일침에 더한 무안으로 지워진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 이상형은 키크고 섹시하고.. 어쩌구저쩌구. 들은 듯 만 듯한 먹구름낀 하늘같은 목소리와 기분이 갑갑하다. 네 얼굴을 보기가 갑자기 힘겹다. 그 순간에 나타난 현우는 저를 탓하며 강아지에게 쫓기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이상 너와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 전과 달리 역기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착지하는 백건. 정말 웃긴다, 하하하. 쫓아오지 마십시오! 김칫국을 마신다는 말 때문이겠지, 별 생각은 안했다고. 하지만 비단 그것때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너는 같은 말을 또 다시 반복했다. 각인하듯이, 꼭 다시끔 새기려 내리찍듯이. 너는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부끄러웠다. 사라지는 뒤통수를 보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 못된 놈. "


네가 중얼거린 눈부신 꿈을 기억한다. 그리고 난, 받은건 무엇이던 되돌려주는 성격이었다. 그날 밤, 백호공자 타도에 실패한 청가람을 통해 난 네게 두 번째 엿을 선사했다.







하늘이 청명하다. 들어올린 역기를 베게처럼 목을 뉘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내내 똥색이더니 드디어 갰구만. 눈꺼풀을 깜박일때마다 눈이 약간 찝찝했다. 깬 지 얼마 안된터에 눈꼽이 낀 것 같았다. 잠시 역기를 내려놓고 눈을 비비던 차다. 신발에 모래가 지글거리는 소리. 누군가 수련하러 온 모양이다. 눈을 들어 확인하기에는 아직 눈이 뿌옇다. 나는 아직도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마 목소리가 들리고도 올려다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누군지 안다면. 그러나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아픈 눈에도 고개를 들었다.



" 야, 주은찬. "

" 응? "


뿌연 시야는 안개처럼. 옅게 보이던 인영은 아주 천천히, 차차 그림을 그리듯 선명해진다. 빗방울에 번진 색처럼 뿌옇고 넓은것이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백건. 널 알았다. 왜? 무덤덤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완연한 시야. 너는 헝클어진 머리를 북적이며 인상을 쓰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네 시선을 마주하며 하늘을 본다. 구름은 평정하고, 새벽공기는 서늘하게 맑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어떤 상황이 될 지 전혀 모른다. 알지만 기억이 안나는 걸지도 모른다. 잠잠히 네 말을 기다린다. 이상하다. 난 그 시간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진다. 적막하고, 고요하고, 또 신기할 정도로 행복한 기분. 눈조차 감지않고 너를 본다. 네가 입을 열기를 기다린다. 너는 무슨 말을 할래? 본다. 그제야 네가 입을 연다.


" 너 요즘 왜 그래? "

" 뭐가? "

" 시치미 떼지마. 너 자꾸 시비걸잖아. "


의문의 표정을 짓는 내게 너는 화를 낸다. 펴질 줄 모르는 눈썹이 인상깊다. 나는 네가 말하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공연히 모르는 체 생각하는 척을 한다. 한참뒤에나 낸 소리. 아! 바닥을 앞발로 파던 네가 나를 본다. 너는 변명을 바라겠지. 이유나. 내겐 확연한 이유가 있다.


" 네가 제대로 대답 안해주니까 그렇지! "

" 무슨 대답? 설마 그때 그거 말하는거야? " 질린 표정. 어이가 없는 건지, 황당한지, 한심한지. 어쩌면 모두. 너는 너무나 쉽게 그런 표정을 짓는다. 물러설만도 하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다.


" 대답한 걸로 아는데. "

" 그런 모호한 대답은 답변이 될 수 없어. "

" 그래? 알았어. " 


한숨. 내리깐 눈이 피곤해 보인다. 큰 손이 용맹한 눈을 덮는다. 문지르는 게 꽤나 센데도 불구하고 네 얼굴엔 짓눌린 자국 하나 없다. 금강불괴의 몸은 단정하다. 나는 여전히 현실감각없이 앞을 보고 있었다. 난 정말로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는데. 큰 일을 감안할 때는 심호흡이나,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기엔 넌 너무나 무심했다. 너는 눈을 감거나 숨을 들이쉬지도 않는다. 백건이 입을 열었다.



" 널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거 같다. 미안하다. "

너는 꺼져가듯이 그리 대답한다. 새소리. 물소리. 어디서 나는 걸까. 한참이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는걸지. 등 뒤에 멘 무게는 팔을 욱신거리게 만든다. 네가 꺼진것보다 더한 무게로 숨을 끈다.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쉰 숨을 바닥까지 내뱉고, 숨이 찰정도로 내쉬고나서야 참는다. 목이 눌리듯 막힌 감각. 평정을 위한 최소의 발돋움이다. 귀 안이 다소 멍멍하다. 티나지 않게, 평소처럼.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네게 지게 될 테니까. 그제야 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대답은? "

" 너 죽을래 주은찬? "


나는 맥없이 웃었다. 내 근거없는 자만과 교만에 대한 수치를 제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그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말을 말자. 입을 다물고 안에선 곱씹더라도 너에겐 보이지 않게 할테다. 아침이나 먹어. 코가 미친듯이 찡하고, 목이 죄이듯이 아픈 상황에서 유일하게 유일하게 멀쩡히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그 이상은 말을 할 수도, 반응 할 수도 없다. 너는 나를 본다. 청가람이 내민 요리에는 고기냄새가 섞인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이다. 너는 우둔하지 않다. 눈치없거나, 멍청하다는 평판을 듣는 건 이성보다 네 하고싶은 대로 움직이는 이유가 크다. 너는 분석을 잘 하고 작은 배려가 배어있다. 역기 내려놓고 싶다. 그러나 그 이후에 네 말과 내가 어떤 반응을 하는 것이 두려워 저린 팔을 디미고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멍청하게 똑똑한 놈. 너는 내가 어떤 상태인 지 알 수도 있다. 모를 수도 있지만 네가 알 거라는 확신이 선다. 너는 배려깊게, 내가 가지고 싶은 혼자만의 시간을 줄 수도 있었고. 또는 눈치없게, 나를 외면하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게 그거다. 그러나 너는 둘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소꿉친구의 부질없는 정이다. 마모된 모서리만큼 희미하게 닳아있는 일말의 양심인지, 죄책감인지. 입술 안쪽이 뜯긴다. 너는 내가 원하는 걸 결국 해주지 않는다. 잔인한 놈. 악독한 놈. 팔이 너무나 저렸다. 코가 어느새 새빨개져 아플정도로 찡한 게 올라온다. 목이 졸리듯이 너무 아프고, 기침이 나올 것만 같다. 무너지듯이 역기를 떨어뜨리고, 몸을 웅크려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얼굴을 덮은 손. 지금 내게 허락된 공간이 단지 그것뿐이다. 열리는 입이 버석하게 마른다. 목구멍에서 갈리듯 나오는 소리는 참으려던 게 터지듯 날카롭고 유려함조차도 없다. 주작답지도 않고 인간같지도 않은 울부짖음이 터진다. 터지는 함성은 웅크려왔던 것보다도 작고, 초라하고, 깊다. 팔안에 묻은 눈을 짓누른다. 아플정도로. 그러지 않고서야 견딜수가 없었다.


가라앉는다. 시커멓게 아래로 떨어지듯이 눈 앞에 보일 모든 색이 빛을 잃을 것 같다. 난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이었다. 따듯한 냄새조차 없이 식고 불만섞인 목소리만이 실린다. 몸은 굳은 듯이 아프다. 말을 꺼내고, 눈을 마주치는 행동을 했을 때야 감정은 선이 이어진다. 단지 무릎을 끌어안고 애꿎은 울음만 짜내는 건 소모성이고, 오래갈 수 조차 없다. 혼자뿐인 눈물이 마른다. 다리가 저려온다. 나는 이제야 일어날 생각을 한다. 너는 여전히 앞에 있다. 왜 그래, 백건. 왜 그래. 그 이상의 울음을 내비치기엔 내 자존심과, 생리적인 고통이 지겹다. 눈을 감았는데도 다시 감는 것 같다. 포기하듯이. 그제야 발걸음이 움직인다. 네가 멀어질 줄 알았다. 기이하게도 머리위에 덮이는 손은 분명히 네 것이다. 그러나 위로가 아니다. 너는 네 큰 손처럼이나, 덮을 뿐이었다. 네가 덮은 것처럼 모두. 


너와 네겐 그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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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