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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11.25 백건은찬 무지
  3. 2014.11.25 둥글레차를 좋아합니다
2014. 12. 16. 02:18

처음 커다란 문을 두드린 걸 기억한다. 들어설 때 나던 낯선 공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볼 시간도 없었다. 앉았을 때 놀랍도록 푹신하던 의자, 제 옆에서 포크를 건네주던 검은 머리의 누나. 예쁘지만 어딘가 피곤해보이던 여자. 나는 모든 걸 어렴풋이, 또한 선명하게 기억한다. 귀 뒤로 들리는 문이 열리던 소리. 처음 보던 또래 남자아이. 귀찮은 듯이, 그러나 한편으론 순종적이게 제 어미의 말을 따라 자신과 걷던. 이름이 뭐야? 대답하던 성가신 음성을 기억한다. 백건. 나는 그 한 마디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아주 오래동안.


8년.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 시간동안 나는 너와 무수히 많은 대련과 대화를 나눈다. 또한 수많은 접촉도. 나는 큰 기이함이나 제게 일어나는 변이나 갑자기 숨이 막히던 모든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알아챈 뒤엔 나와 네 곁엔 어느새 떨어지지 않을 두 명이 더 붙어있었다. 우습지만 내게는 정말로 당연하게 너를 좋아했다. 자각한 뒤에는 너와 함께 있을 시간이 이전과는 달리 여겨진다. 단 둘이. 너와 있고 싶었다. 옆에는 현무와 청룡이 있다. 너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끼어들만하다고 유치한 생각을 해야만 할 사람들은 아니다. 길가에서 지나친 넘어진 아이처럼. 가볍다. 존재와 의의조차도 희미하다. 그러나 그것은 끈덕지게 제 마음에 달라붙어 답답함으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지나치기 전에 잡아줄 것을, 또는 일으켜 줄 것을. 이미 늦은 일이며 나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련하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에 오기 전에 너에게 말을 할 것을, 좀 더 빨리 자각할 것을. 좀 더 많은 시간을 둘이 보낼 것을. 몇 번이고 곱씹던 손톱처럼 행동만큼이나 미미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못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난 네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 할 수 있고, 다른 이들보다 유대도 뛰어나며 서로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보다 높다. 내가 웃거나 넋을 놓을 때도 넌 의문을 가지거나 일일히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바라보는 것처럼 너도 내게 익숙해진 터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너는 무례할 정도로 당당하고 털털하며, 그럼에도 아주 가끔씩은 쑥맥처럼 군다. 그리고 친근한 이에게만 보이는 까칠한 다정함이 있다. 너를 좋아한다. 그러나 간혹, 마음을 간절하게 하는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다. 나는 네가 하는 행동이 뿌듯하고, 친숙해 좋기도 했지만 못내 섭섭하기도 했다. 식탁위에 놓인 물을 집어드는 남자. 백건. 부르면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익숙하고 뇌리에서 잊을 수 없는 모습 그대로다. 왜?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말투가 불손하다. 냉장고에 찬 음료 있어. 너는 대답없이 뒤돈다. 못들은 것처럼, 또는 신경쓰지 않는것처럼. 그리고 넌 내 말을 듣고 냉장고 문을 연다. 손잡이를 잡은 손은 크다. 하하. 난 들릴 듯 말듯 웃는다. 냉장고 문 위로 삐져나온 색이 옅은 머리카락. 이상하게 당연한 것이 좋았다. 네가 스스로 감당하기 벅찰만큼 좋았다.


아침에는 부스스하게 눈을 뜬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교복이 걸려있을 장농을 쳐다본다. 닫힌 나무문. 오늘은 열 일이 없을거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약간 찌뿌둥한 어깨를 돌며 밖을 내다본다. 종이 사이로 보이는 빛은 아침이었다. 문을 열면 마당, 옆을 보면 매화장. 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는다.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나무 위에 서있는 건 너. 그처럼이나 당연하게 너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게 틀어지거나 잘못되리란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올곧은 믿음.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을지. " 좋은 아침. " " 어. " 무미건조하고 의미있는 대화. 내게는. 그랬다. 나는 우뚝 솟은 나무들 앞으로 걸어간다. 한 발로 서서 역기를 들고 있는 너는 우람하게도 보인다. 현우와 청가람은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선선하다. 가슴이 파인 제 옷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닭살이 돋는다. 몸을 움직이면 괜찮아 지겠지? 나는 위에 있는 너를 올려다본다. 시선을 느낀 너의 반응이 느리다. 오래토록 올려다봐야만 시선을 내린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거나 걷는게 당연한 것처럼. 이것도 같다. 백건. 제 이름이 불린 이유를 묻는 얼굴. 불안, 조급, 초조함. 나는 이상하게 기대감마저도 없이 인사만큼이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백건. "

" 왜 자꾸 불러? " 인상 쓴 얼굴. 저러니 까칠하다고 소문이 나지.

" 나 너 좋아해. "


백건이 들고 있던 역기는 무거워서, 떨어짐과 동시에 매화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다.





' 왕철씨! 어서 가요. '

" 나 저 배우 보기싫어, 안 봐. "

" 공자, 언제 마지막으로.. "

" 더러워! "


기운차구나. 먼. 문 안에서 한참동안이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할머니와의 대화를 마치고 일어선다. 제 다리에 몸을 비비는 멍뭉이가 푹신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건으로 마른 얼굴을 문지르는 백건이 있다. 당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빽건! ㅂ 발음은 언제나 악센트가 실리기 마련이라 저는 종종 별명처럼 그리 부르곤 했다. 꼭 친구끼리 부르는 애칭처럼 들린다. 이 생각을 알거든 백건이 나를 한강물에 던지려 들겠지. 제 생일에 은이 누나가 온다는 말에 백건은 집을 나선다. 수염도 안 깎는거 봐 저거.. 안경을 저리 잘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한다. 문을 나서기 전 멀어지는 뒷모습을 본다. 째진 눈으로 쨍알대는 청가람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고, 방으로 들어가려 벽을 짚던 참이다. 곁눈으로 보이는 매화장. 아직도 쓰러져있는 나무들, 파편. 선명하게 찍힌 자국. 먼지 바람이 허황하게 분다. 나무조각이 날아오진 않을까? 의미없는 생각을 한다. 그처럼 나는 네 대답을 기억했다.


' 제발 친구로 끝내자. '


주변이 엉망이 된 원인이 제가 아닌듯이, 녀석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라 생각한건가. 너는 네가 만드는 소란을 가볍게 여기면서도 주도면밀한 면이 있다. 너는 쉽게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을 수도 있지만 그리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고, 너도 그렇게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멀어지려던 뒷모습을 마저 본다. 꽁무니 하나. 어째 입술이 씰룩거린다. 고작 그 정도 반응이라 이거지.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본다. 저와 같은 방향을 눈을 반짝이며 보던 현우. 그래. 일단은 이정도면 될테다. 네가 먼저 안하면 내가 다시 하지. 주먹을 쥔다. 세게. 뚫어질 듯 문을 바라보는 현우를 보며 사람좋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 쟤 속세나들이 하네. 기왕 가는김에 같이 가봐. " 

" 정말입니까 주작공자! " 그래도 됩니까? 미심쩍게 들리는 질문이었으나 바라는 대답은 표정에서 훤히 보였다. 

" 응. 어차피 네가 같이가면 백건도 나돌아다니기 귀찮아져서 금방 돌아올걸. "


답례로 나는 네게 엿을 보냈다.






아침 수련때다. 제가 망가뜨린 매화장을 드디어 수리해놓은 백건이 옆에 있다. 평정 유지, 근육 단련! 수련하면서 들었던 구부정하고 낡은 말들은 의미없이 머리속을 지나간다. 무념무상이 수련에 가장 좋다고 하지만 여러생각이 머리속을 지나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자 목소리, 여자 목소리. 그 중에 앙칼졌던 여자 목소리. 난 양아치는 정말 싫어! 날 때릴거야.. 넌 친구밖에 모르니? 하늘을 본다. 유나비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가볍고 큰 의미없는 문제에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백건이 저를 본다. 난 아무말도 안했는데. 들었는데도 들은 것 같지가 않다. 


" 친구에서 더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건가? "

" 제발 친구에서 끝내자. "

" 너 말고! "


소리친 후에야 같은 대답을 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아, 이런 멍청한.. 질린 기분이 든다. 저 놈이나 나나 아침때라 머리가 덜 깼나보군. 때아닌 무안은 김칫국을 들이마신다는 냉철한 일침에 더한 무안으로 지워진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 이상형은 키크고 섹시하고.. 어쩌구저쩌구. 들은 듯 만 듯한 먹구름낀 하늘같은 목소리와 기분이 갑갑하다. 네 얼굴을 보기가 갑자기 힘겹다. 그 순간에 나타난 현우는 저를 탓하며 강아지에게 쫓기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이상 너와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 전과 달리 역기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착지하는 백건. 정말 웃긴다, 하하하. 쫓아오지 마십시오! 김칫국을 마신다는 말 때문이겠지, 별 생각은 안했다고. 하지만 비단 그것때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너는 같은 말을 또 다시 반복했다. 각인하듯이, 꼭 다시끔 새기려 내리찍듯이. 너는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부끄러웠다. 사라지는 뒤통수를 보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 못된 놈. "


네가 중얼거린 눈부신 꿈을 기억한다. 그리고 난, 받은건 무엇이던 되돌려주는 성격이었다. 그날 밤, 백호공자 타도에 실패한 청가람을 통해 난 네게 두 번째 엿을 선사했다.







하늘이 청명하다. 들어올린 역기를 베게처럼 목을 뉘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내내 똥색이더니 드디어 갰구만. 눈꺼풀을 깜박일때마다 눈이 약간 찝찝했다. 깬 지 얼마 안된터에 눈꼽이 낀 것 같았다. 잠시 역기를 내려놓고 눈을 비비던 차다. 신발에 모래가 지글거리는 소리. 누군가 수련하러 온 모양이다. 눈을 들어 확인하기에는 아직 눈이 뿌옇다. 나는 아직도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마 목소리가 들리고도 올려다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누군지 안다면. 그러나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아픈 눈에도 고개를 들었다.



" 야, 주은찬. "

" 응? "


뿌연 시야는 안개처럼. 옅게 보이던 인영은 아주 천천히, 차차 그림을 그리듯 선명해진다. 빗방울에 번진 색처럼 뿌옇고 넓은것이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백건. 널 알았다. 왜? 무덤덤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완연한 시야. 너는 헝클어진 머리를 북적이며 인상을 쓰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네 시선을 마주하며 하늘을 본다. 구름은 평정하고, 새벽공기는 서늘하게 맑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어떤 상황이 될 지 전혀 모른다. 알지만 기억이 안나는 걸지도 모른다. 잠잠히 네 말을 기다린다. 이상하다. 난 그 시간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진다. 적막하고, 고요하고, 또 신기할 정도로 행복한 기분. 눈조차 감지않고 너를 본다. 네가 입을 열기를 기다린다. 너는 무슨 말을 할래? 본다. 그제야 네가 입을 연다.


" 너 요즘 왜 그래? "

" 뭐가? "

" 시치미 떼지마. 너 자꾸 시비걸잖아. "


의문의 표정을 짓는 내게 너는 화를 낸다. 펴질 줄 모르는 눈썹이 인상깊다. 나는 네가 말하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공연히 모르는 체 생각하는 척을 한다. 한참뒤에나 낸 소리. 아! 바닥을 앞발로 파던 네가 나를 본다. 너는 변명을 바라겠지. 이유나. 내겐 확연한 이유가 있다.


" 네가 제대로 대답 안해주니까 그렇지! "

" 무슨 대답? 설마 그때 그거 말하는거야? " 질린 표정. 어이가 없는 건지, 황당한지, 한심한지. 어쩌면 모두. 너는 너무나 쉽게 그런 표정을 짓는다. 물러설만도 하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다.


" 대답한 걸로 아는데. "

" 그런 모호한 대답은 답변이 될 수 없어. "

" 그래? 알았어. " 


한숨. 내리깐 눈이 피곤해 보인다. 큰 손이 용맹한 눈을 덮는다. 문지르는 게 꽤나 센데도 불구하고 네 얼굴엔 짓눌린 자국 하나 없다. 금강불괴의 몸은 단정하다. 나는 여전히 현실감각없이 앞을 보고 있었다. 난 정말로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는데. 큰 일을 감안할 때는 심호흡이나,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기엔 넌 너무나 무심했다. 너는 눈을 감거나 숨을 들이쉬지도 않는다. 백건이 입을 열었다.



" 널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거 같다. 미안하다. "

너는 꺼져가듯이 그리 대답한다. 새소리. 물소리. 어디서 나는 걸까. 한참이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는걸지. 등 뒤에 멘 무게는 팔을 욱신거리게 만든다. 네가 꺼진것보다 더한 무게로 숨을 끈다.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쉰 숨을 바닥까지 내뱉고, 숨이 찰정도로 내쉬고나서야 참는다. 목이 눌리듯 막힌 감각. 평정을 위한 최소의 발돋움이다. 귀 안이 다소 멍멍하다. 티나지 않게, 평소처럼.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네게 지게 될 테니까. 그제야 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대답은? "

" 너 죽을래 주은찬? "


나는 맥없이 웃었다. 내 근거없는 자만과 교만에 대한 수치를 제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그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말을 말자. 입을 다물고 안에선 곱씹더라도 너에겐 보이지 않게 할테다. 아침이나 먹어. 코가 미친듯이 찡하고, 목이 죄이듯이 아픈 상황에서 유일하게 유일하게 멀쩡히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그 이상은 말을 할 수도, 반응 할 수도 없다. 너는 나를 본다. 청가람이 내민 요리에는 고기냄새가 섞인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이다. 너는 우둔하지 않다. 눈치없거나, 멍청하다는 평판을 듣는 건 이성보다 네 하고싶은 대로 움직이는 이유가 크다. 너는 분석을 잘 하고 작은 배려가 배어있다. 역기 내려놓고 싶다. 그러나 그 이후에 네 말과 내가 어떤 반응을 하는 것이 두려워 저린 팔을 디미고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멍청하게 똑똑한 놈. 너는 내가 어떤 상태인 지 알 수도 있다. 모를 수도 있지만 네가 알 거라는 확신이 선다. 너는 배려깊게, 내가 가지고 싶은 혼자만의 시간을 줄 수도 있었고. 또는 눈치없게, 나를 외면하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게 그거다. 그러나 너는 둘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소꿉친구의 부질없는 정이다. 마모된 모서리만큼 희미하게 닳아있는 일말의 양심인지, 죄책감인지. 입술 안쪽이 뜯긴다. 너는 내가 원하는 걸 결국 해주지 않는다. 잔인한 놈. 악독한 놈. 팔이 너무나 저렸다. 코가 어느새 새빨개져 아플정도로 찡한 게 올라온다. 목이 졸리듯이 너무 아프고, 기침이 나올 것만 같다. 무너지듯이 역기를 떨어뜨리고, 몸을 웅크려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얼굴을 덮은 손. 지금 내게 허락된 공간이 단지 그것뿐이다. 열리는 입이 버석하게 마른다. 목구멍에서 갈리듯 나오는 소리는 참으려던 게 터지듯 날카롭고 유려함조차도 없다. 주작답지도 않고 인간같지도 않은 울부짖음이 터진다. 터지는 함성은 웅크려왔던 것보다도 작고, 초라하고, 깊다. 팔안에 묻은 눈을 짓누른다. 아플정도로. 그러지 않고서야 견딜수가 없었다.


가라앉는다. 시커멓게 아래로 떨어지듯이 눈 앞에 보일 모든 색이 빛을 잃을 것 같다. 난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이었다. 따듯한 냄새조차 없이 식고 불만섞인 목소리만이 실린다. 몸은 굳은 듯이 아프다. 말을 꺼내고, 눈을 마주치는 행동을 했을 때야 감정은 선이 이어진다. 단지 무릎을 끌어안고 애꿎은 울음만 짜내는 건 소모성이고, 오래갈 수 조차 없다. 혼자뿐인 눈물이 마른다. 다리가 저려온다. 나는 이제야 일어날 생각을 한다. 너는 여전히 앞에 있다. 왜 그래, 백건. 왜 그래. 그 이상의 울음을 내비치기엔 내 자존심과, 생리적인 고통이 지겹다. 눈을 감았는데도 다시 감는 것 같다. 포기하듯이. 그제야 발걸음이 움직인다. 네가 멀어질 줄 알았다. 기이하게도 머리위에 덮이는 손은 분명히 네 것이다. 그러나 위로가 아니다. 너는 네 큰 손처럼이나, 덮을 뿐이었다. 네가 덮은 것처럼 모두. 


너와 네겐 그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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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울리에
2014. 11. 25. 16:05

너는 태평하다. 언젠가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넌 자신과 싸우지 않는 나를 보며 당황했었다. 그 종말은 섭섭해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홧김에 아는 진실을 쏟아낼 수도 있었다. 넌 그러지 않았다. 나를 알고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넌 스스로 뭐가 좋은 지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기억이 돌아왔을 때 너를 아무렇지 않게 맞이할 수 있었던 건 네 덕분이었다.


너는 명민하다. 솔직히 나는 너를 잘 알 수 없다. 넌 어떻게 해야할 지 아는 사람이었다. 난 너를 알려하지 않았고, 넌 누군가 너를 파헤치도록 만든 일은 없었다. 의도한 건지, 천성적인 건지. 알고지낸 시간이 긴 것은 친밀함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낯을 가리는 데 도움이 될 사유는 아니다. 본디 스스럼없고,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 야, 비켜. " 컴퓨터에 코를 박은건지 얼굴을 박은건지 모를 주은찬이 고개를 든다. 내려다보는 위치. 멀뚱멀뚱하게 보는 표정은 억울함을 호소하지는 않는다. 상황파악을 못하는 건지, 낙천적인 건지. 팔목이 헐렁한 후드티. 지겹지도 않나. 주은찬은 안 그래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상을 백수처럼 보이게까지 하는 능력이 있었다. 저 놈의 칙칙한 똥색. 그러니 내가 널 처음에 뭣도 없는 놈으로 봤지.


" 나 아직 영화 보는중인데. 지금이 하이라이트야! " 하는 말도 뻔뻔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표정, 다른 표정. 쉬운일이다.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작의 머리를 밟는 일은. 꾸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낸다. 멍청이. 낮게 중얼거리는 걸 주은찬은 듣는다. 예상한 반응. 예상한 표정. 발을 뗀다. 얼굴을 문지르며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평정하겠지. 포커페이스의 달인은 현무만이 아니다. 예상한 대답. 들을 필요는 없었다. 등을 돌리는 일은 무엇보다 쉽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하고, 뻔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밤이다. 컴퓨터는 옆 방에 있다. 꽁알대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던지 짜증났다던지 그런건 없다. 상황이 안중에 없고 아직 보는 중이라는 말이 귀에 남는다. 발을 떼고 그대로 돌아올 때 주은찬의 표정이 어땠을 지는 불보듯 뻔하다. 청가람은 여전히 이상한 잠꼬대를 한다. 시끄러워.. 입을 열었으나 말을 주고받기가 귀찮았다. 걷어찰까? 순간적으로 든 충동을 억눌렀다. 그래도 이제껏 지내온 정이 있으니.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을 든다. 나는 친절하게도 밟거나, 걷어차는 흉흉한 방법 대신 누운 청가람을 곱게 발로 굴렸다. 방 끝까지. 벽에 막힌 청룡을 처박을 기세로 꾹 누른다. 끄어어.. 벽은 제법 까칠하다. 그런데도 얼굴을 마구 부비는 걸 보며 질색했다. 저건 내 탓 아니다. 아침에 지 얼굴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게 뻔하다. 어차피 나는 그 전에 등교하니까. 


주변이 어둡다. 땅이 있는 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발을 더듬을 때 짚이는 땅이 있다.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앞으로 걸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대로, 걸었다. 타박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동굴처럼 고요하지만 소리가 울리진 않는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소리. 익숙한 소리다. 음성으로 내는 소리는 아니지. 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발을 멈춘다. 앞은 여전히 새카맣다. 침침한 듯한 정적. 내 몸이 보였었나?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손 곁으로 비치는 옅은 빛. 빨간색. 갑작스레, 목이 막혔다. 울컥거리리듯 꽉막혀 올라오는 것에 막힐듯한 숨을 급히 들이킨다. 코 끝이 찡할정도로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메여왔다. 단지 빛이라서? 반가워서? 그런 기본적인 생각을 하기엔 주변은 너무나 시커멓다. 심호흡하듯이. 새카맣기만 한 광경을 깜박인다. 멈춘 발을 뗀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발을 돌린다. 그처럼 아주 천천히, 상체를 돌렸다. 공포영화 중 긴장되는 순간, 주인공이 몸을 조심스레 돌리는 것처럼. 뒤돌아봄과 동시에 제 앞을 밝히는 것. 제가 들은 건 불이 타오르던 소리였다. 


갑자기 밝혀진 빛은 당황스럽지도 않게, 눈을 떴을 때 어깨를 덮는 이불처럼 펼쳐진다. 눈꺼풀에 얹히는 빛은 제 고개를 들게 하는 법을 알았다. 그제야 나는 빛나는 것을 본다. 떠오른 형체가 하염없이 하늘거리는 불을 휘감는다. 땅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강같기도 하고, 한복 저고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없이 빨갛고 빨간. 유일하게 색이 다른 손이 제 앞을 지나갈적에야 고개를 들었다. 고고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자는 표정이 없다. 손을 뻗으매 불이 한없이 흘러내린다. 제 앞에서 불처럼 일렁거리는 머리카락은 현실같지가 않았다. 영험하고, 경이롭다. 초월한 것처럼 초점이 없는 눈동자. 그 눈이 일렁이며 저를 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굴을 명확히 보고있는데도 완연히 보이지 않는다. 누구지. 또한 누구? 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일까. 표정이 없는 것처럼, 마치 무생물처럼. 한없이 불을 제 밑으로,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었음에도 마주친 것 같지 않다. 그러던 도중, 불이 제 앞을 지나친다. 나를 향한 시선.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그 형체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웃는건가? 자세히 보려 눈을 찌푸린다.


새소리. 지저귀는 소리는 소란스러울 때도 있고, 소음보다 고요할 때도 있다. 눈을 켠다. 어둠속에서도 제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는 것 같다. 몸을 일으킨다. 부스럭거리는 이불소리. 솜은 무겁고, 따듯하면서도 여러 소음을 만들어 낸다. 끙 소리를 내며 짚은 팔에 무게를 싣는다. 무슨 꿈을 꿨는데. 확연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눈 앞에 어른거리던 붉은 빛이 있던것만은 기억난다. 뭐였지? 불난 꿈을 꿨나? 머리를 짚는다. 왠만한 건 전부 기억해왔었는데. 명확하게 기억나는 게 없었다. 장지문 밖을 내다본다. 아직 푸르스름한 빛이 문 틈 사이로 보인다. 아침이 되려면 조금 시간이 남는다. 하기사, 알 게 뭐람.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다시 잠을 청했고, 금쪽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옆에 백건, 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어디서 들어본거 같은데. 눈이 뜨이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우리 지각이다? ㅎㅎ; 라며 어설프게 웃는 주은찬의 말을 듣고나서야 놀란 숨을 들이켰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간발의 차로 비껴나간 주은찬이 다급한 비명을 내지른다. 허겁지겁 옷을 끄집듯이 끌어내리며 그걸 왜 지금 말해!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은찬은 여전히 제 이불 옆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민망한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웃는다. " 나도 이제 일어났거든. " 질린 표정으로 보는 주은찬의 얼굴은 다크서클이 서려있다. 쟨 대체 영화를 몇 편이나 본거야. 오늘 컴퓨터에 암호를 걸어놓던가 해야지. 혀를 찬다.


보라색 안경. 존재감을 희미하게 해주는 물건으로 집에서 가져온 이 희귀한 물건은 제 옆에 달라붙은 화려한 빨간머리 놈때문에 무색해질 때가 많다. 평소같으면 터미네이터의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교문을 통과했을건데, 현재 운동장을 오리걸음으로 걷는 것도 이 녀석 때문이지. 빌어먹을 주은찬! 운동장이 울리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뒤에서 걷고있는 주은찬의 난처한 웃음이 들린다. 굳이 돌아보진 않는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것에 심란한 기분이 든다. 궁시렁대며 입을 열었다.


" 저리 떨어져, 주은찬. 너 때문에 나도 걸렸잖아. "

" 지각은 원래 걸려... "


이것보라지, 뻔한 대답. 나는 이상하게 이를 갈았다. 시끄러워. 그러나 돌아가는 대답이 티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저런 재수없는. 돌아오는 대답을 무시한다. 이유는 모른다.


수업은 귀에 들어온다. 펼쳐보는 교과서의 문장도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정신이 산만한 건 아니란건데, 이상하게 집에 오는 과정이나 집에 돌아오고나서의 모든 기억이 안개속에 갇힌 것같다. 상기하려는 건 그걸 헤집으려는 듯이 무색하게 뿌옇도록 힘들다. 피곤은 몰려오는 해일만큼이나 갑작스럽고, 무겁다. 나는 어떤 정신이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이불에 퍼져있었다. 너 괜찮아? 엎어진 베게 사이로 나는 어렵게 눈만을 내민다. 무릎을 짚고 나를 내려보는 주은찬. 걱정스럽기보단 의아한 표정이다. 체력만큼은 탄탄하기 그지없을 몸이다. 그런데 대답조차 하기 힘들다. 으.. 제가 들어도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걸 보며 옆에 있던 청룡과 현무는 삿대질을 하며 웃는다. 인상을 찌푸릴 힘도 없다. 자고 싶다. 엄청나게 자고 싶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게 입 밖으로 나갔을 리도 없건만. 하체까지만 보이는 주은찬은 제 무릎을 짚은 손을 뗀다. 뻗은 다리는 뒤돈다. 피곤한가봐. 약점을 보이는 지금! 이럴때가 기회입니다! 울리듯이 들리는 목소리. 일어나면 현우 넌 내가 족친다. 먼 곳에서 들리는 나무소리, 종이소리. 눈 앞은 환한 대낮인데도 캄캄한 영상이 보였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한다. 문이 닫혔나? 오늘 먹은 점심엔 고기가 없었는데, 오늘 저녁은 불고기였나? 허망하고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며 드디어 무거운 눈을 감는다. 


일차적으로 눈을 뜬 건 밤이다. 제 위로 올라탄 청가람을 창문닦듯이 밀쳐내는 걸로 뻐근한 몸을 풀었다. 음냐 음냐. 옹알거리는 목소리가 부스스하게 들린다. 청가람의 잠버릇은 누구나 볼 수 있게 형상화시키고 싶다. 눈 앞에서 박살낼 수 있는걸로. 누구때문에 뻐근한 어깨를 몇 번 돌리고, 잠결에 찌든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어제와 같이 몸부림을 치는 녀석을 벽으로 찼다. 깨던 말던 상관은 없지만 잠결중에도 무의식중에 고양이처럼 안전하게 착지한다. 저건 놀랄만하군. 의미없는 감탄이었다. 부메랑처럼 다시 되돌아오려는 습성을 가진 녀석의 등 뒤로 제법 무겁던 옷장을 밀어 누른다. 끄으으..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정적이지 쬐끄만 남정네 잠꼬대가 아니다. 생각하고 싶은 게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주작이 있다. 어두운 가운데 홀로 형형히 빛을 내는 형체가 익숙하다. 드디어 완연한 모습을 본다. 강림한 주작이다. 그 눈에 비친 제 모습은 사람이었다가, 어느새 백호의 모습이 되어있다. 어금니가 크게 이글거리며 이를 바득가는 사나운 맹수. 꿈같은 광경이었지만 당연하게 여겨졌다. 세상의 것이 아닌것처럼, 공중에 떠 있던 불꽃이 천천히 내려온다. 발이 닿던 바닥은 불로 얼룩진다. 눈을 내리깐 채, 강하게 존재하던 것이 고개를 든다. 그것은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친 순간에, 갑자기 주작은 눈을 접어 웃었다. 건아. 울리는 목소리는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붉은 날개가 퍼덕인다. 그 순간에 나는 주작에게 달려들어 무거운 앞 발로 가슴을 눌렀다. 컥. 짧은 신음. 다시 눈을 열어 보는 표정은 언제그랬냐는 듯이 평온하다. 주은찬. 영험하다. 나는 어떤 의식도 없이 입을 벌린다. 그는 위기감도 없는지, 마치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신기한 것처럼 바라본다. 일렁거리는 불꽃은 새하얀 손의 형체가 된다. 올라오는 하늘거리던 팔. 제 볼을 어루만지고 입술을 매만지는 것을, 씹었다. 제게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얼굴부터 씹어내려가는 동안 날개가 마구 퍼덕였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은 입술이 열려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손 안에 가둔 새가 빠져나가려 날개짓하는 것만 같았다. 발버둥치는 몸을 억누르고 마구 물어뜯고 씹어대며, 삼킨다. 웃는 얼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날개를 물어뜯을때, 목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을 둘러본다. 바닥에 끌린자국과 위치가 달라진 장농이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이 땀으로 미끌거린다. 이불을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주무른다. 의미있는 꿈일까. 두려움인지, 놀라움인지 가슴이 쿵쾅거린다. 한없이 불안하면서도 더없이 마음이 가라앉는다. 일어섰다. 낮아진 천장. 장농사이로는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상관할 바가 아니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열어젖힌다. 아이고! 어디선가 약하고 얇은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하늘에 별이 수없이 떠있다. 눈은 분명히 앞을 보고 있는데 정신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끊임없이 푸득거리던 날개. 목에서 울리던 비명소리. 웃던 얼굴. 건아. 신경쓸 겨를이 없다. 내밀 던 손 앞으로 수없이 날리던 비단같던 불길. 제 문을 닫지도 않고 쿵쿵 소리를 내며 마루를 걸었다. 달린건가? 바로 옆의 문을 열어제낀다. 쾅! 큰 소리가 난다. 주은찬. 컴퓨터를 머리맡에 둔 채 자고있는 주은찬이 있다. 안 일어났어. 현무는 보이지 않는다. 왜 없을까? 자세히 생각을 해볼만한 시간이 있었고, 신경쓸만한 관계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자고 있는 주은찬의 위로 올라탄다. 손을 치켜든다. 머리를 쥐어박을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 모른다. 얼굴을 치는 대신 귀 옆으로 주먹을 내리쳤다. 떠지는 눈. 놀란 듯이 동공이 수축되어있다. 역시. 반응은 뻔하다.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어떤지 문득 궁금했다. 가만히 바라봤지만 방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렴풋이 보이는 건 맹수가 아니었다. 그래? 아닌가보네. 아무렴 어때. 이미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난 왜 여기에 왔지? 왜 주은찬 위에 올라탄 걸까. 왜 주은찬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잠깐의 침묵. 처음으로 입을 연 건 너였다. " 컴퓨터 안돌려줘서 화났어? " 멍청하기 그지없긴. 상냥하기도 하지. 


고개를 내린다. 천성인지, 습성인지. 어두운 가운데서도 주은찬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의아한 표정. 바보같아 보인다. 입을 벌린다. 크게 솟은 송곳니가 지금은 제게 없었다. 물어뜯기는 힘들겠지. 앞이 팽팽 돈다. 뭔가에 쫓기듯이. 머리속은 맑기 그지없는데 솔직히 내가 무슨짓을 할 지 알 수가 없다. 만류하려는 생각조차 없다. 주은찬은 팔을 든다. 헐렁한 옷. 아주 약간 소매가 내려간다. 제 볼에 닿을 것처럼 손을 뻗친 그는, 주변을 맴돌 뿐 만지지는 않는다. 팔이 내려간다. 꿈처럼. 난 그를 집어삼키는 대신에 입술을 덮었다. 가까운 시야에서 네가 눈을 큼직하게 뜨는 걸 본다. 놀란 표정. 딱히 어떤 행동을 하진 않았다. 고개를 들자 당황한 듯 뻐끔거리던 모습. 이불 안에 있던 나머지 팔조차 어느새 삐져나와있다. 뭔가에 대비하는 것처럼.


" 뭐야? "


소리치는 데도 꼭 속삭이는 것 같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다시 입술을 부딪혔다. 나도 몰라. 이가 부딪히던 말던 본능적으로 입술을 집어삼키고, 다물려는 입이 괘씸해 볼떼기를 부여잡는다. 정신나갔어? 어이없듯 손 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못들을만한 건 아니었다. 깔아내리듯이. 이마를 내리누르며 혀를 섞었다. 도망가려는 듯 움직이는 게 오히려 저를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었다. 나도 해본적은 없지만. 어깨를 잡아 밀쳐내려는 손. 무술수련을 한 사람답게 제법 억세다. 그러나 주은찬은 단 한 번도 무예에서 저를 이긴 적이 없다.


입술을 뗀다. 내리누르던 이마가 벌겋게 불거져있다. 양 팔을 짚는다. 팔에 가둔 것 같은 모양새가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생소하면서도 묘하게 손끝을 저리게 만들었다. 화를 낼까? 이미 네 반응은 봤다. 이젠 네가 행동할 차례였다. 난 네가 어떻게 행동할 지 알 수가 없다. 후려칠까? 답답하다. 주은찬은 찌푸린 눈으로도 저를 올려다본다. 내뱉는 기침. 정답이 아닌걸 억지로 때려맞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정답은 아니겠지. 인상을 구겼다. 네가 어떻게 하던 일단은 당해줄 생각이었다. 주은찬은 기침을 멈췄다. 정적. 무기를 들기 전, 싸움을 하기 전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은, 그런 평온함이 달려든다. 검은 눈.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그랬다. 팔뚝을 부여잡았던 손이 올라온다. 손가락 기네. 주은찬은 저를 후려치지도, 화를 내지도, 발로 까지도 않았다. 그저 한 손을 크게 벌려 제 볼을 잡았을 뿐이다. 약하게. 뭘 하는거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까 제가 억죄인 볼이 빨개진 걸 본다. 복수인가? 엉뚱한 대답으로 선생의 화를 사는 것처럼. 나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짧은 시간은 끝이 났다.


손을 떼낸다. 손은 아주 힘없이 떨어진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때 몸이 경직했다. 알 바 아니다. 제 머리를 감싸안은 것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몸을 덮은 후드티를 벗겨낸다. 거부감없이 순순히 따르는 것에는 작게 놀랐다. 순진하다? 순박하다? 그런 단어가 어울리지는 않는다. 한 손에 무게를 실어 배를 짓누르자 생리적인 신음이 터진다. 어깨를 잡은 채, 내리누르는 게 아픈지 이를 악물고있다.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입술을 내린다. 익숙한 몸이다. 수련할때나, 간혹 옷을 갈아입을 적 봤던 몸이 지금은 아주 다르게 보인다. 상태를 설명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가슴에 입맞추고, 한 손으로 장난치듯이 만지던 젖꼭지를 물어뜯고, 깨물었다. 아프잖아! 분명 야한 신음은 아니다. 머리를 잡아쥐는 힘도 약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이 미칠것처럼 제 머리속을 팽팽 돌게 만든다.


배로. 배를 짓누르던 손을 바지속으로 집어넣었을 땐 주은찬은 생전 처음 본 표정을 했다. 부끄러움, 억누름, 민망함, 그리고 견디기 힘든 것처럼. 아직 작던 주은찬의 것을 잡는다. 몇 번 흔들자 그는 싫은 소리를 낸다. 이런 반응을 누구에게 보여준 적은 없겠지. 왠지 모를 감정이 차오른다. 바지를 벗긴다. 같이 목욕하기를 싫어했던가? 좋아했던가. 주은찬은 주작의 후계답게 이 쪽 털도 빨갛다. 우스움에 저도 모르게 킬킬거렸을 때 매서운 손바닥이 머리를 후려쳤다. 작게 들리는 욕짓거리. 성질도 드럽지. 아, 지금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다리를 벌린다. 순순하게 따르는 모양새가 기이할 법도 한데, 잠에서 들 깬건지. 이 쪽 외에 생각할 것이 없다. 작고 말랑한 것을 몇 번 억세게 흔들자 그는 웅크리듯 무릎을 굽히고 얼굴을 붉힌다. 너 좀, 살살..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한 손으로 배를 누르자 컥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상황인데. 다시 올라타 내려다보는 주은찬은 눈을 찌푸린 채 뭔가를 꿍얼거리고 있다. 삼킬것처럼 크게 벌린 입은 아직 맹수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 나는 벌려진 입술을 문다.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물고, 빨고. 혀를 집어넣을때 주은찬은 무의식적인지, 몇 번 저를 물었지만 약하기 그지없었다. 입 안 전체를 눌러내리듯 섞고, 도망갈 것처럼 위축된 혀를 몇 번이고 핥고 건드리고, 깨물었다. 아, 윽. 입술 사이로 새는 신음이 이런거구나.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손에 쥔 주은찬의 것을 움직인다. 어느새 손에 찰 만한 크기로 커진걸 엄지로 문지르자 주은찬은 얼굴을 가렸다. 지금 네 얼굴은 어떨까. 나는 손바닥을 펼쳐보는 것만큼이나 쉽게, 네 반응을 알 수 있었다. 손을 펼치고 얼굴을 덮은 주은찬의 손을 덮는다. 움찔거리는 반응이 느껴진다. 큰 조개껍데기라도 벗기는 것처럼, 난 천천히 주은찬의 손을 들어올린다. 힘겹게 눈을 내리깐채, 입을 굳게 내리고 있다. 놀랐다. 예상한 반응인데도 마치 처음보는 것같다. 짐작한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정말 나는 주은찬이 이런 반응을 할 거라고 알고 있었던가?


명확한 사고,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기분. 입술을 곱씹으며 다리를 벌린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걸 내리누른다. 악! 탄성 소리처럼 들린다. 현명하게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 좋으리란 걸 주은찬은 알고 있다. 너는 언제나 그랬다. 옳은 것을 떠나, 어떤 것이 가장 평탄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에 손가락을 댄다. 너는 순순하게도 입을 벌린다. 손가락을 집어넣자 약한 무게에 조금 더 입술이 벌려졌다. 너는 약간 힘들고, 붉어진 얼굴로 미미하게 손가락을 핥는다. 나는 정말로 네가 어떤 행동을 할 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사실 정말로 너를 알 수 없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장악하듯이, 적셔진 손가락을 예고없이 찔러넣는다. 앓는 소리가 난다. 어깨에 닿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밀어내듯이 조이는 입구를 힘으로 열었다. 움직이기 시작할 적에 주은찬의 눈이 크게 터진다. 갑작스러운 반응. 나는 내 행동이 끼칠 여파조차 몰랐다. 주은찬이 천천히 입을 벌린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울리는 것 같다. 주은찬? 이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주은찬은 마침내, 소리질렀다.  


" 아아아악!! 아파!! " 


아프다는 말을 연신 뱉고, 외치고, 지른다. 갑자기 얼굴이 돌아갔다. 아플리가 없는데, 볼때기가 후끈후끈한 기분이 든다. 생전 처음으로 처음으로 싸다구를 맞았다. 머리채를 쥐어뜯긴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있는대로 인상을 찡그리고 방을 마구 땅으로 찧는다.  쿵, 쿵. 그리고 사람 고함소리가 꽤나 소란스럽다. 그나마 평화로운 걸 좋아하는 녀석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 원인은 저였고. 주은찬이 이렇게 빨랐었나? 밑으로 끝없이 끌어내리는 힘에 목덜미가 땡겼다. 쯧. 혀를 차곤 제 머리를 잡은 팔목을 세게 움켜쥔다. 내겐 많은 시간이 없지만 그 중엔 네 사정을 봐줄 용의도, 여유도 없다. 야, 백건. 잠깐만. 눈 앞의 생물은 진저리를 친다. 떼내는 건 어렵지 않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힘에 의해 천천히 떨어진다. 역시 제법 힘 세구만. 이를 악문채 저를 보는 눈은 평소와 같다. 독기, 괘씸함, 경멸, 모멸같은 걸 품을만도 한데, 그런 게 주은찬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저 아파죽겠으니까 치는 몸부림이었다. 나는 아무말없이 주은찬을 내려보고만 있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올라온다. 성나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진정할때에야 구겨진 표정이 펴지기 시작한다. 어둠속에서도 확연히 보인다. 그제야 손을 움직인다. 여전히 녀석은 몸을 위축시켰지만 아까와 같은 격렬한 저항은 하지 않았다.


집어넣은 손가락이 두 개째. 드디어 소음이 잦아들때가 되서야 준비가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제 물건을 꺼냈다. 발기할 부분이 하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발기해있었다. 박을거야.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아픔에 시든 주은찬의 것을 꽉 쥔다. 쾌감을 주기위한 동작은 아니었다. 끄윽.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몸을 붙이고, 입구에 제 것을 댔다. 들어갈거야. 안 들어가면 억지로라도 쑤셔넣을거고. 서슬퍼런 목소리가 제가 낸 소리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이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일렁이는 파도, 물을 받아놓은 대야, 강같은. 잔잔한 물결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릴적, 세수대야에 담겨진 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제 모습이 일렁이며 비치는 게 확연하지 않다. 언제쯤 일렁이는 게 멈출까? 제가 완벽하게 비친 것이 보고 싶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담겨진 물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움직임이 아주 멈출때까지. 마침내, 움직임이 아주 멈췄을 때 나는 내 얼굴이 비치는 걸 보고 싶어 까치발을 든 채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머리. 그 순간,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다시 일렁이던 물. 나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 오랜 기다림은 무엇이었지? 손을 들었다. 여전히 제 얼굴은 한참이나 흔들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물을 내리쳤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전히 고요를 휘저으려 몸을 들었다.


몸을 숙인다. 제 옷거지 위로 주은찬의 가슴이 닿는다. 아주 미미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바닥을 짚고, 주은찬의 그 곳에 제것을 들이민다. 헉.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 도망치지 못하게 어깨를 단단히 잡는다. 주은찬은 제 팔뚝을 잡았다. 꽉 쥔 손은 하얗게 힘줄이 드러나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지않은 압박감에도 안으로 파고들었고, 마침내 완연히 넣은 뒤에야 으스러지게 잡은 어깨를 놓았다. 끝이야? 한없이 약하면서도 무덤덤한 목소리가 울린다. 아니. 내 목소리는 꼭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빌어먹을. 주은찬이 힘없이 웃었다. 너는 큰 덩어리같다. 비록 나는 너를 내려보고 있지만 마치 마주보는 것처럼. 움직였다. 헉, 윽. 아윽. 견디기 힘든것처럼 눈썹을 팔자로 휜 것이 흔들린다. 나는 먹이감을 본다. 사냥을 하는것처럼 매섭게 쳐다보는 눈빛을 반쯤 찌푸린 눈이 마주한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너는 어떨지 모른다. 호기심보다도 음욕이 앞섰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8년동안 알고지낸 친구가 몸부림치는 것을 누르고, 다리를 벌리고, 제 것을 처박고 움직이기까지. 범하는 건 우습게도 하루만의 변덕같은 충동이었다. 움직일 적마다 고개를 젖히고 팔에 얼굴을 문지르듯이 부빈다. 어디서 난 땀인지 번들거리는 목이 몸만큼이나 움찔거리고 제 팔뚝을 부여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얼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지. 나는 문득 정신을 그리 돌렸다. 젖힌 채 자기 팔에 가려진 터라 완연히 보이지가 않았다. 주은찬, 얼굴 보여. 너 진짜 양심없다. 몇 번이고 뚝뚝 끊기는 음성이 들린다. 주은찬은 기가 막힌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본다. 나는 다시 허리를 움직인다. 악! 눈을 잔뜩 찡그렸다. 나는 계속 너를 주시하고 있다. 마침내 찡그린 표정을 풀은 너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이상한 표정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은 애달프게 것처럼 바뀌고, 아주 천천히 뜨이는 저를 바라본다. 달궈진 얼굴. 네 것이 닿았던 배 부분은 어느새 축축해져 있다. 사정하려는 건가. 발돋움을 하듯이 몸을 뒤로 빼고, 세게 쳐올렸다. 아아! 짧고 고요한 신음. 너는 참기힘든 표정을 한다. 발로 이불을 찢을듯이 부비며 사정했다. 내가 보통사람이었다면 팔이 부러졌을 거란 생각을 한다. 움찔움찔 떨리는 모습이 너무나 생소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쉬웠다. 밤이다. 주변은 어둡고. 제가 백호의 후계자라 하더라도 상대의 완벽한 모습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밤 눈이 완연히 익고, 달빛을 받은듯이 옅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 길지않은 네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본다. 그 안에서, 붉지않음에도 불꽃처럼. 천천히 켜지는 검은 눈을 본다. 나른해보인다. 강간당한 처녀처럼, 또는 색기어린 유혹의 자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것이 더없이 강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 윽. "


우습게도 나는 그런것에 사정했다. 주은찬은 초점없이 저를 본다. 사정이 끝날 무렵에야 정신이 들었다. 사고가 윤리적으로 이어진다. 난 대체. 당황하며 제 것을 빼자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으으으.. 주은찬이 싫은 소리를 낸다. 피, 그리고 약간 갈색섞인 액체. 두서없는 상황에서도 무엇인지는 안다. 제 표정은 난처하기 그지없겠지.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머리속에서 확연히 정리된다.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까. 입술을 열었지만 곧 다물었다. 그건 모욕이었다. 제길. 어쩐지 제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나간 것 같다. 그는 애초에 신경쓰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아픈 건 싫은데..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내려다본다. 별 미동도 없고. 아픈듯이 가끔씩 쓰으하며 숨을 들이킬 뿐이다. 원하는 진전은 아무것도 없었다. 멈추는 숨. 그제야, 입을 열었다.


" 왜 가만히 있었어? " 

" 네가 물어뜯을 것 같았어. "


주은찬이 자기를 본다. 마치 그제야 알아챈 것처럼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초조함.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나는 질문을 했고, 이제 네가 반응을 할 차례다. 그런데 나는 네 반응을 알 수가 없다. 내 표정이 어떨까. 손에 땀이 차고, 목이 타는 것 같다. 이제 난 네 반응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다. 단지 그거야?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다시 밑이라도 아픈것처럼 눈썹을 찡그린 너는 입을 연다. 


" 다른 대답이 필요해? "


반응할 수 없었다. 지금 들은 말을 계속 머리속에서 곱씹는다. 꼭 아주 예전에, 또는 꿈에서나 들었던 말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머리통을 후려친 것 같다. 잠꼬대가 시끄러워 걷어찼던 청가람이 쫓아와 여의주라도 던졌을까? 씩씩대며 장롱이라도 던진건가? 그러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제법 큰 소란이었음에도 깬 이도 없었다. 범하는 건 쉬운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너에겐 쉬운일이었다. 주먹을 내리친다. 결국 난 주은찬을 때리진 못했다. 내가 들은 게 네가 한 말이었다. 충격에 반사적으로 뜨인 눈이 아까와 다를 바가 없다. 너에겐 뭐가 달라졌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던 순간, 나는 분노보다 상실감을 느꼈었다. 흔들리는 제 얼굴은 일그러져있었다. 물 때문이 아니다. 지금도 매한가지다. 허망함. 마음속이 빈 것처럼 황폐함만이 맴돈다. 목까지 차오르는 숨은 텅 빈 것같다.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 젠장. "


할 수 있는 말이 그뿐이었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지를 추르며 몸을 돌리려던 차에, 난 무의식적으로 주은찬을 내려다본다. 난처하게? 곤란하게? 넌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네 표정은 연민도, 분노도, 기가 찬 것처럼, 또한 황당한 일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나. 난처함이나 곤란한 표정도 아니었다. 초연함. 너는 그저 곰곰히, 많은 생각을 하는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그 중에 내 생각이 있을까.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쥔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마저 네가 입을 살짝 벌린 게 청조하다고 생각한다. 하!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이 기만보다 한숨처럼 들렸다. 문을 쥐어뜯듯이 잡아연다. 백건. 덤덤한 목소리가 진절머리날 정도로 듣기 싫었다. 뭔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작다.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겠지.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젠장할.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빌어먹을 주은찬. 빌어먹을.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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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울리에
2014. 11. 25. 09:56

주은찬을 가장 좋아하는 곳.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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